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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탈북피아니스트 김철웅 교수: 음악의 자유 찾아 사선을 넘어 하나님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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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inga
댓글 0건 조회 1,961회 작성일 15-06-03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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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6월3일 수요일 8:00) 시온연합감리교회에서 특별한 집회를 합니다.

김 교수의 피아노 연주, 탈북 이야기와 간증 집회에 특별한 은혜가 있을 것 입니다.




간증/탈북피아니스트 김철웅 교수: 음악의 자유 찾아 사선을 넘어 하나님 만나다
기사입력: 2011/05/13 [18:16]  최종편집:ⓒ 매일종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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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탈북피아니스트 김철웅 교수


음악의 자유 찾아 사선을 넘어 하나님 만나다


피아니스트 김철웅은 1975년 북한 노동당 고위간부와 대학교수인 부모 사이에 태어났다. 평양음악무용대학을 수석 졸업한 뒤 러시아 차이코프스키국립음악원을 거쳐 1999년부터 평양국립교향악단 수석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 2001년 음악의 자유를 찾아 북한을 탈출, 현재 백제예술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며, 음악을 통한 남북화합에 주력하고 있다.<편집자주>


 

제가 피아노를 접한 계기는, 어렸을 적에 라디오에서 음악이 나오면 손뼉 치며 즐거워했답니다. 제가 8살 때 평양음악대학생을 뽑는다는 공고가 붙었습니다. 합격하면 8살 때부터 음악대학생이 됩니다. 피아노교육은 대학교수들에게 받고, 기초교육은 일반교육과 똑같이 받습니다. 학생 수가 8백 명인데 교직원이 1700명입니다. 이 학교에 들어가려면 3천대 1의 경쟁을 뚫어야 합니다. 지원자 6000명 중 피아노부문은 2명을 뽑습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머리가 좋아도 출신성분이 좋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하는 곳입니다.

왜 이렇게 철저 하느냐 하면, 북한에서는 음악을 체제유지를 위한 선동수단으로 보기 때문에 음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제일 당에 충실한 사람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8살 때부터 음악대학교에 들여보내 음악과 함께 제도에 대한 우월성, 김일성과 김정일 위대성을 교육시킵니다. 저는 8살 때부터 부모님과 국가의 택함을 받고 음악을 배웠습니다.

평양음악대학을 수석 졸업하고 러시아에 유학 가서 문화적 충격도 받았지만, 가장 충격적인 것은 내가 배운 클레식이 전부가 아니다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1899년 낭만파음악까지만 가르칩니다. 저는 1899년으로 클레식이 끝난 줄 알았는데, 현대클래식을 만난 것입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커피숍에서 들은 재즈는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재즈는 인간의 모든 것을 말살한, 주체사상원리에 반대되는 사악한 음악으로 규정합니다. 금지곡이에요. 동물처럼 몸을 이상하게 흔드는, 디스코 춤도 못 추게 합니다. 

이제까지 몰랐던 것에 눈이 트이고 귀가 트이니까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거슬렸습니다. 저들의 위선과 모순이 보였고, 저들과 묻혀있다는 자체가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것처럼 불안했어요. 2천만 명이 이 사실을 하나도 모르고 있다는 게 측은했습니다. 고민 끝에 내가 추구하는 음악을 찾고자 2001년 10월 17일 탈북 했습니다.

‘탈북’하면 무섭고 어렵게 생각하지만 저는 너무 쉽게 했어요. 두만강 강변을 오르락내리락하였는데 경비대원들이 나타나 신분증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평양국립교향악단 수석피아니스트여서 평양시민증을 보였더니 말투가 부드러워졌습니다. 어머니에게 훔쳐온 5천 원을 찔러주면서 강 건너 친척이 와있는데 잠깐 갔다 오겠다고 하니, 꼭 갔다 오라면서 길을 안내해 줘서 두만강을 발에 물 안 묻히고 건넜습니다.

나는 중국에서 피아노 치면 먹고 살 줄 알았습니다. 새벽 3시경 불 켜진 집을 찾아가 내가 평양음악대학을 졸업하고 차이코프스키국립음악원을 나와, 평양오케스트라의 수석피아니스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피아노가 뭔지도 몰라요. 여기서 먹고 살려면 일을 해야 한다고 해서 그 집에 머슴으로 한 달간 일했는데 피아노만 치던 손에 진물이 질질 났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힘든 일을 했지만 자유가 좋았어요. 이후 해발 4천 미터의 산에 들어가 임업노동자 생활을 했습니다. 평양에서는 명 품만 들고 다녔고, 일본제 옷을 입고, 승용차는 국가에서 준 벤츠 600을 끌고 다녀 부러운 게 없었습니다. 북한 국립교향악단 수석피아니스트는 국가에서 차관급 대우를 해줬어요. 매일 승용차로 물과 김치까지 갖다 줬어요.

산속에서 임업노동을 할 때는 인부 50명 모두 중국 사람이어서 중국말을 빨리 배웠지요. 어느 날 사무실에서 오라고 해서 가 보니 탈북자가 있었어요. 그 사람은 4년 동안 중국의 조선족교회를 다니며 구걸하다가 더는 갈 데가 없어 산속으로 들어온 거예요. 그 사람이 이틀간 어디 갔다 오더니 나에게 교회로 가자는 거예요. 공짜로 먹여준다면서. 그러나 나에게는 예술가의 자존심이 있어서 나는 거지가 아니다며 거절했습니다. 교회 갈 이유가 없었어요. 북한에서 알려준 교회의 이미지는 좋지 않습니다. 깜깜한 곳에 십자가 예수상이 있고, 초 두세 개 켜 놓고 수배당한 사람의 애인이나 친척의 거처를 대라고 하는데 엿듣고 있다가 안기부에 전화하는 사람이 목사나 신부에요. 언더우드 선교사를 한국전쟁을 발발하게 한 간첩이라고 말합니다. ‘원수도 사랑하라’고 가르쳐 제국주의자들이 침략해도 국민들이 저항하지 못하도록 그런 교육을 시키는 것이 종교다고 가르칩니다.

이 친구가 교회 가면 피아노가 있다는 말에 귀가 번쩍 튀여 가보니 피아노는 없고, 탈북자 7~8명을 모아놓고 아침 9시부터 밤 7시까지 성경만 읽게 하는 거예요. 이들은 해설은 못하지만 성경구절 지식은 박사예요. 거기서 한 20일 있었는데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 때문에 죽었다고 하는데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그냥 성경만 읽으라는 거예요. 읽으면 안다고. 이들 중 하나님, 예수님을 부르며 울면 나는 ‘쟤는 예수와 친척 되나 보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국에서 온 목사님이 부흥회를 하는 곳에 가서 피아노를 본 순간 ‘사람이 누구도 못 준 피아노를 하나님이 여기 준비시켜주셨구나’라고 느껴지며 두 손을 꽉 잡고 나도 모르게 ‘하나님 감사합니다. 피아노를 보게 해 주신 것만도 고맙습니다.’ 라는 기도가 나오고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졌습니다. 내가 피아노를 쳐보려고 피아노 뚜껑을 열려고 하자 누가 와서 피아노를 꽝 쳐요. 그때 저는 180센티 장신에 몸무게가 48킬로그램이었고, 산속에서 노동을 하다 왔으니 그 몰골이 어떠하였겠습니까. 피아노 반주자가 온 몸으로 막으면서 “이 물건 만지는 것 아니거든요.” 그러는 거예요. 제가 한 번만 치게 해 달라고 사정하여 피아노에 앉았는데, 하나님께 드릴 거라고는 나의 귀한 손 밖에 없었어요. 첫 곡으로 언젠가 들었던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쳤지요.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신앙고백을 이 손으로 한 거예요. 울면서 피아노 치는 내 모습을 본 목사님들이 감동받았고, 전 성도들은 점심도 안 먹고 뛰어나왔어요. 그렇게 해서 피아노 반주자로 임명받았습니다.


교만함 때문에 두 번 체포당해

하나님과 약속 철저히 지켜야

하나님 믿고 기도하면 살려줘


중국에서 한국으로 올 때 두 번이나 체포당했는데 모두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목사님들과 어느 부흥회장에 갔을 때입니다. 조선족 집사님들이 나에게 “안녕하세요, 목사님” 하고 인사를 해서 나는 “네” 하고 거리낌 없이 인사를 받았습니다. 선교사님들이 위조여권을 줘서 한국행 비행기를 타려고 북경공항으로 갔을 때도 교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일행이 다섯 명이었는데 나는 ‘못생긴 여자 4명과 잘생긴 나와 5명’이라고 생각했고, 나는 잘 생겼으니까 당연히 잘 되겠지 하고 페스포트를 내밀었는데 나만 붙잡혀서 14시간 동안 죽기 직전까지 매를 맞았습니다. 다른 이유가 없었어요.

나를 호송하는 기차는 화장실 창문도 쇠창살로 막아놨지만 내가 나갈 수 있는 곳은 그 곳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제발 저 창문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고 창문을 여니 창문이 열리는 거예요. 기차에서 뛰어내리려고 몸을 창밖에 내밀었는데 승강장 위에서 라면 먹던 경찰과 눈이 마주쳤지만 경찰은 나를 못 보았습니다. 나는 창문에 몸을 내밀어 밖의 승강대 손잡이를 잡고 몸을 날렸더니 다리가 승강대 계단에 닿았고, 우측의 지붕으로 올라갈 쇠계단을 겨우 손으로 잡아 기차 지붕 위로 올라간 후 첫 칸에서 끝에 칸까지 뛰어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인데 금방 잊어버렸습니다. 살려만 주시면 하다가 살려주시니까 산 게 나로 인함이에요.

다음에는 북한으로 잡혀 들어갔어요. 이번에는 살려달라고 기도할 수 없어서 ‘이제 김철웅이는 하나님 것이니 죽이시든 살리시든 마음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나는 북한 가면 죽는다 생각하고 자살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제가 죽으면 지옥 보내지 마시고 천국 보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는데 ‘왜 그렇게 보채냐. 설칠 이유가 없지 않느냐’ 이런 마음이 드는 거예요. 이걸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라 생각하고 북한에 들어갔더니 우리 아버지 후배가 내 담당수사관이에요. 이 사람은 출신성분이 안 좋아 승진을 못했는데 아버지 도움으로 승진한 사람이어서 무사히 풀려났습니다. 그날 밤 중국으로 나와 이번에는 너무 쉽게 한국에 왔습니다.

제가 만난 하나님은 높고자 하는 자는 낮추시고 낮춘 자는 높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건방지면 진짜 죽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에 어떤 악조건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 살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신용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과의 약속은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저를 통해서 행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피아노 때문에 한국에 왔지만 북한에서 살아보고 남한에서 살고 있는 내가 음악을 통해서 남북한의 화합을 위한 선봉자적 역할을 하는 요셉과 같은 인물로 선택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음악은 정치력이나 군사력, 경제력으로도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조용필이 북한에서 노래 부를 때 북한 사람들이 박수치며 함께 노래했습니다. 음악이 아닌 그 어떤 것으로도 북한 주민들에게 그런 진실된 노래를 부르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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