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킹제임스 성경 3종 비교 분석 上 (Comparative Analysis of 3 Korean King James Bibles, Part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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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4. 15.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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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 James Bible의 우수성에 대하여는 제가 여러 차례 포스팅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15세기에 서양 최초로 구텐베르크를 통해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하게 하셔서 성경책의 대량 인쇄가 가능하게 되어 종교개혁이 일어났듯이, 17세기에는 셰익스피어로 대표되는 영문학의 꽃을 피우게 하셔서 가장 정확하고 아름다운 영어로 KJB이 번역되게 하셨고, 19세기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드셔서 KJB을 온 세상에 보급하셨으며, 20세기에 미국이 최강대국이 되게 하심으로 영어가 명실상부한 전 세계 공용어가 되어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donnafaithfellowship/223233867305

저는 노안이 와서 성경책보다 주로 성경앱에서 글자를 크게 확대하여 읽곤 했는데 "Left Behind" 영화의 아래 비디오 클립을 보니 언젠가 성경과 기독교 서적들을 인터넷으로 접속하거나 앱으로 열 수 없는 시대가 오겠더라고요. 따라서 종이로 된 성경책도 반드시 소지하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https://youtu.be/R6EIZn9ksh8?si=dfXWli-PbmenGimR (1분 27초)

남의 일 같지가 않은 게 저도 팬데믹 때 코로나 백신 관련해서 제 의학·건강 블로그 계정이 몇 번의 위기를 넘겼거든요. 저는 한 블로그의 카테고리를 나누지 않고 주제별로 블로그 자체를 세 개 만들었습니다. 한 개로 통합했으면 블로그가 지금보다 더 성장했겠지만 계정이 날아가면 백업 채널이 없으므로 여러 개로 분산시켜 놓길 잘했다 싶어요.

어떤 분들은 우리말 킹제임스 성경들이 하도 말도 많고 탈도 많아서 영어 킹제임스 성경만 본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미국에서 산 지 15년쯤 되었지만 17세기 영국식 영어는 말할 것도 없이 21세기 미국식 영어도 힘들어서 매일 모르는 단어나 표현이 꼭 나온답니다. 심지어 원어민 미국 사람들도 KJB은 읽기 버거워해요. 아래 사진은 1917년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 소설인 춘원 이광수의 "무정" 첫 장인데 무슨 소린지 아시는 분~ 100년 전 한국어 소설도 못 읽는 판에 400년 전 영어 성경을 원어로 읽으시겠다고요? 그냥 번역본 보세요^^;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617407

성경앱은 무료이나 성경책은 가격이 만만치 않잖아요.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신학자나 목회자가 아닌 소비자의 입장에서 어떤 성경책을 구입하는 것이 좋은지 합리적 구매 의사 결정을 위해, 우리말 번역본 중 한글킹제임스, 표준킹제임스 그리고 흠정역 마제스티 3종을 비교 분석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글킹제임스와 표준킹제임스는 앱에서 복사했고 흠정역 마제스티는 아직 앱으로 출시되지 않아 책 보고 타이핑했습니다. 앱에는 2011년에 나왔던 킹제임스 흠정역 400주년 기념판이 수록된 것 같습니다.

이 리포트에서는 제가 생각할 때 가장 심각하고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10개의 성경 구절들을 뽑아 비교 분석합니다. 변개된 사본의 문제점에 대하여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때 KJB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여 우리말로 번역하신 수고와 노력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모든 역본에 한 문제당 기본 점수 7점을 드립니다. 10점 만점에 10문항이므로 총점은 100점입니다. 개역개정(개정), 한글킹제임스(한글), 표준킹제임스(표준), 흠정역마제스티(흠정)는 괄호 안의 약어를 썼고 3종 성경 각 구절의 끝에 점수를 매겼습니다. 여러분들도 각자의 기준으로 채점해 보세요.

1. 구원 - Work out (빌립보서 2:12)

KJB: Wherefore, my beloved, as ye have always obeyed, not as in my presence only, but now much more in my absence, work out your own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개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한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복종했던 것처럼 내가 있을 때뿐만 아니라 내가 없는 지금도 더욱더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 (7점)

표준: 이런 이유로 나의 사랑을 받는 자들아, 너희가 늘 순종해 왔듯이, 내 앞에서뿐만 아니라 내가 없는 지금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나타내라. (9점)

흠정: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한 것같이 내가 있을 때뿐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 (10점)

이 구절은 행위를 통한 구원을 주장하시는 분들이 근거로 드는 1순위입니다. <개역>에서 구원을 "이루라"라고 한 부분의 동사는 KJB뿐만 아니라 NIV, ESV, NASB 등 모든 영어 성경에서 work out으로 "운동하다"가 가장 보편적인 뜻이고 다음으로는 수학이나 과학에서 수식을 계산하여 결과를 산출할 때 널리 사용됩니다. 기업의 워크아웃(workout)이라는 용어도 자주 들어보셨을 텐데요, 사전적 의미대로 운동을 해서 군살을 빼고 몸을 건강하게 만들 듯이 부실 기업의 회생을 위해 불필요한 사업과 인력을 정리하고 재무 구조를 개선하는 작업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구원을 이루라고 한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구원을 다른 사람들도 알 수 있도록 밖으로 "나타내라" 또는 "드러내라"라고 조언을 한 것입니다.

심지어 행위 구원을 강조하는 가톨릭 성경에서조차 이 부분을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라고 하지 "구원을 이루라"라고까지는 안 합니다. 그런데 <한글>은 <개역>의 "구원을 이루라"에 KJB 원문에도 없는 부사인 "온전히"까지 추가하여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라고 번역했습니다. <표준>은 "구원을 나타내라"라고 바르게 번역했지만 1점 깎은 이유는 "my beloved"를 수동태(be+loved) 그대로 "나의 사랑을 받는 자들아"라고 너무 곧이곧대로 직역하여 부자연스럽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나의(내) 사랑하는 자들아"가 더 우리말답습니다.

2. 칭의 - Justify (로마서 3:24)

KJB: Being justified freely by his grace through the redemption that is in Christ Jesus:

개역: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한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음이라. (8점)

표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그분의 은혜로 값없이 정당함을 입증받았느니라. (7점)

흠정: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고 인정받았느니라. (10점)

이 말씀에서 나오는 구속(救贖)은 속박한다는 뜻이 아니고 구원(救援)과 비슷한 말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 redemption(구속)이란 "속전을 치르고 구해내다"라는 redeem의 명사형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죄의 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믿음으로써 값없이 의롭다고 여겨집니다. 이것이 바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중세 가톨릭으로부터 목숨 걸고 지킨 프로테스탄트의 이신칭(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 교리입니다.

그런데 <표준>에서는 칭의(justification)를 너무나도 당당하게 "정당성을 입증받았느니라"라고 해석하는 바람에 저는 거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상 영어에서 justify가 "정당화하다"라는 뜻으로 사용이 되기는 합니다. 뭔가 옳지 않은 일을 해놓고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 때 주로 쓰는 부정적인 의미의 단어인데, 한술 더 떠서 "정당성을 입증받다"라니요. 누가 정당하고 뭐를 입증한다고요?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자격 없는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은 것이지 우리는 결코 정당하지도 않고 당연히 이를 입증할 수도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prisoner)였다가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을 뿐이지 여전히 죄인(sinner)입니다. 아마추어 비전공자가 봐도 저 부분은 반드시 고쳐야 할 것 같습니다. <한글>의 "의롭게 되었음이라"는 <표준>보다는 훨씬 낫지만 칭의는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쳐주시는 것이므로 조금 부정확합니다.

3. 성화 - Walk (에베소서 5:8)

KJB: For ye were sometimes darkness, but now are ye light in the Lord: walk as children of light:

개역: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한글: 너희가 한때는 어두움이었으나 이제는 안에서 빛이니 빛의 자녀들로서 행하라. (7점)

표준: 이는 너희가 예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이제는 너희가 안에서 빛이기 때문이라. 빛의 자녀들로서 살아가라. (9점)

흠정: 너희가 한때는 어둠이었으나 이제는 안에서 빛이니 빛의 자녀들로서 걸으라. (10점)

"행하다"라고 번역된 영어 단어 중에 walk인 경우가 많습니다(롬 6:4, 갈 5:16, 엡 5:2, 엡 5:15 등). 그런데 이것은 다닐 행() 자를 사용한 것입니다. 한글 성경이 나왔던 100여 년 전에는 "행하다"가 "다니다, 걷다"의 뜻이었지만 시대가 변천함에 따라 언어의 의미도 바뀌어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행하다"라고 하면 실제로 무슨 일을 하는 것이라고 인식합니다.

우리말에도 "인생길을 걷는다"라는 표현이 있듯이 여기서의 walk란 성화의 삶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얼마 전 제가 침례 받을 때도 목사님의 침례사가 "walk in newness of life"로 끝나더라고요. <표준>은 "살아가라"라고 의역을 했는데 원문의 뉘앙스를 살린 <흠정>의 "걸으라"가 더 적합한 것 같습니다. <한글>은 <개역>의 "행하라"를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https://m.blog.naver.com/donnafaithfellowship/223408128631

4. 성령 - Quench (데살로니가전서 5:19)

KJB: Quench not the Spirit.

개역: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한글: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7점)

표준: 을 식게 하지 말라. (10점)

흠정: 불길을 끄지 말라. (9점)

이 말씀도 행위 구원 진영에서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지 않다고 주장할 때 즐겨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구원을 받았어도 바르게 살지 않고 자꾸 나쁜 짓을 저지르면 그 사람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소멸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불멸의 영이기 때문에 소멸할 수 없습니다.

영어 단어 quench의 일차적인 뜻은 "갈증을 해소하다"이고 다음으로는 "불을 끄다(extinguish)"입니다. 그래서 소화기를 fire extinguisher라고 하지요. 이찬수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다가 정신 차리라고 하면서 "제가 찬물을 잘 끼얹습니다. 그래서 제 이름이 찬수입니다."라고 하셨던 기억이 나네요^^ 저 구절을 실감나게 표현하면 "성령에 찬물을 끼얹지 말라"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고상한 말로 써야 하니까 <표준>의 "식게 하지 말라"가 무난해 보입니다.

<한글>은 <개역>과 동일하게 "소멸하지 말라"라고 했고요. <흠정>은 "성령의 불길을 끄지 말라"라고 의역했는데 마제스티 이전 판의 "성령을 억누르지 말라"가 제 생각에는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보통 불로 표현되지만, 어떤 경우에는 바람이나 비둘기로 묘사되기도 하니까요. 참고로 표준역과 흠정역에서 이탤릭 체로 표기된 것은 원문에는 없지만 매끄러운 번역을 위해 역자들이 첨가한 부분입니다.

오늘은 4번까지 다루었고 다음 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https://blog.naver.com/donnafaithfellowship/223421403195

Do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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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거나 관심이 있는 분들과 경건한 교제를 나누며 성경 말씀과 중보 기도를 통해 거룩한 한인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이루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