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고로 당신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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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도 누군가의 탓을 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자는 의미로 글을 작성해보았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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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선은 조용히 해산물 볶음밥 위에 머물러 있다.
탱탱한 새우살의 탄력을 느껴보기도 전,
앞에 앉은 이의 깊은 한숨이 식탁을 울린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본다.
묻지는 않지만, 묻고 있다는 걸 알 수 있게 —
그렇게 조용한 무대가 마련된다.
그리고 그는, 마치 독백하듯 말하기 시작한다.
와이프에 대한 섭섭함.
자신은 희생했다고 느끼는데,
상대는 그러지 않는다는 생각.

가끔은 일을 그만두고
뭔가를 되갚아주고 싶다는 충동도 있지만,
그럴 순 없다고 말한다.
사회적 책임이 그를 묶고 있다고.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그의 얼굴 너머로 어딘가 어린 표정이 겹쳐진다.
마치 이렇게 외치는 것 같다.
"나는 특별하다는 걸 느끼고 싶어."
특별함을 통해 상처받은 자존을 복구하려는 아이.
그런 아이는,
자신보다 특별해 보이는 대상을 향해
화살을 쏘기도 한다.
지금 이 자리처럼.
나는 말없이 숯불 향이 배인 볶음밥을 한입 삼킨다.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는 이미 화가 나 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조용한 끄덕임뿐.
속으로는 생각한다.
이건 단지 그의 기준일 뿐이고,
와이프에게도 또 다른 진실이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런 말을 꺼냈다간,
그는 ‘손해 보는 인생’이라는 말을 꺼낼지도 모른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누가 더 아까운가를 비교하는 일에 익숙해졌다.
TV도, 커뮤니티도, 친구들도
누가 더 손해 봤는지 말하라 종용한다.
그리고 스스로 손해 본다 느끼면,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이 인생은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하지만 — 그 손해, 정말 다 본 건가?
눈에 보이는 것만 계산한 건 아닌가?
눈에 안 보이는 것이 훨씬 많은 세상에서,
그 모든 걸 고려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예전의 나는
그런 말을 하다 낭패를 본 적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틀릴 가능성이 담긴 말은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나는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린다.
"이게 다 당신 때문입니다, 데카르트 씨."
몸과 마음을 분리한 철학자.
그가 이룬 이원론은
과학과 종교, 물질과 정신을 나누었고,
결국 인류에게
‘선택해야 한다’는 운명을 남겼다.
물론 그는 위대한 사람이었고,
그 덕에 우리는 고전 물리학을 얻었지만—
그 분리는 아직까지도,
우리 삶 곳곳에 균열을 남긴다.
그래도 나는 생각한다.
그의 잘못은 아니다.
정보는 전달자에 불과하며,
그 이후의 진화는
다음 세대의 몫이니까.
언젠가는 누군가가
그 단절을 다시 잇고,
통합의 언어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겠지.
그게 내가 아닐지라도,
그런 사람은 나타날 거라 믿는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앉은 이도
진심으로 잘되길 바란다.
하지만 그것이
그가 고통스러운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진실이 반드시 고통스러워야 할까?
변화는 부드러울 수도 있다.

진실도, 마치 볶음밥처럼 —
눈앞의 한 끼를 온전히 음미할 수 있을 만큼
따뜻하고 향긋한 것이길.
지금과는 다르게,
휴대폰 없이, 비교와 평가 없이,
눈앞에 있는 것을 진심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여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진실인지도 모른다.
데카르트 씨,
우리는 모두 당신의 자식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도 자신만의 말을 하게 되겠지요.
자신만의 진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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