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잡치는 단어 "동방예의지국" > 자유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뒤로가기 자유게시판

기분 잡치는 단어 "동방예의지국"

페이지 정보

작성자 nonickname 작성일 19-11-05 03:55 조회 389 댓글 2

본문

너무 자주 자유게시판에 들어와 설치는 거 같아 좀 자중하렵니다. 오래 전부터 가슴에 맺혔던 단어들 중에 "동방예의지국"에관해서 바로 적시한 글을 만나 소개합니다.

제발 우리를 500여년 수탈한 중공을 멀리 쳐내는 방향으로 전진하는 대한민국으로 변화되기를 소원합니다.


+


 제목:"동방예의지국" 상당히 역겨운 말입니다.

(중국애들이 예의 잘 차린다고 불로준 말)








http://blog.daum.net/richardhong/12679758



아래 높이 솟아 보이는 영은문(迎恩門)은 조선왕조 초엽부터 중국(명나라, 청나라)에서 오는 사신을 맞이하던 모화관(慕華館) 앞에 세웠던 문이다.

1896년에 독립협회가 이 문을 헐고 그 앞에 독립문을 세웠다. 워낙 높고 불안정하여 끈으로 고정시켜 놓은것이 보인다. 지금은 위의 지붕과 목조물은 다 헐리고 주춧돌만 2개 남아있다.




1433DA024C3870FCB0

 

 

영은문에는 약소국인 조선의 설움이 배어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의 횡포가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조선의 처녀들까지 조공으로 바치게 강요합니다. 평민뿐만 아니라 벼슬아치의 딸도 선발을 합니다. 태종 8년(1408) 중국으로 보낼 처녀를 뽑는 자리에 평성군 조견의 딸이 중풍에 걸린 것처럼 입을 실룩거리고, 이조참의 김천석의 딸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으며, 전 군자감 이운로의 딸은 절름발이처럼 절룩거려 선발을 모면해 보려고 합니다. 화가 난 중국 사신 황엄은 아버지들을 귀양 보내고 파직하도록 합니다. 이렇게 선발된 처녀들이 영은문에서 가족과 생이별을 할 때 부모형제들의 울부짖는 소리로 영은문 주위는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으니 사신의 배웅을 나온 조선 국왕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청일전쟁이 끝난 뒤인 고종 32년(1896) 영은문은 사라지고 대신 독립문이 들어섰습니다.

이때 영은문의 주춧돌을 남긴 것은 치욕을 기억하고 자주를 위해 국력을 키우자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화냥년'의 유래

이후 끌려갔던 조선 여인들 중 일부가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는 데 그 여인들을 '환향녀(還鄕女)' 즉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이라 불렀는 데 대부분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을 차별해서 부른 욕이 '환향년'에서 '화냥년'으로 발전하여 이제는 '남편이나 정인을 버리고 도망나가 바람난 못 된 여자'의 표현으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다부숴 버려도 모자른데 기분 나쁘게도 헐리고 남은 영은문 주초(주춧돌)은

심지어 사적 3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73B021B4C386AEBC1

 

 

영은문(화냥년의 슬픈유래가있는..)에서 우리 선조들이 울부짖었던 500여년의 피맺힌 한이 담긴 중국사신들을 환영하고 배웅한 문입니다.


댓글목록 2

왕구름님의 댓글

왕구름 작성일

지금 부턴 화냥뇬 대신 원래 뜻인 환향뇬으로 부르면 죽음을 무릅쓰고 고향으로 돌아온 조선의<br />여인들을 떠올릴 수 있겠지요<br />지네 나라 여인들을 지켜내지 못한 남정내들은 석고대죄 하렸다 !!<br />요즘은 동방예의 지국에서 동방무례지국으로 바뀌었는 데 그래도 중공사람들 보단 예의벌라<br />보입니다 ㅎㅎ

bagsoo님의 댓글

bagsoo 작성일

노닉네임님 계속 좋은글 올려주이소  아래에 쭉 보니 포리스테이션 라는자가  딴지를 거는데  그자가 가짜뉴스,유언비어 라고 얘기하는데  정확히 뭐가 가짜뉴스고 유언비어 인지  밝히지도 않고  그냥 가짜고 유언비어라 자기혼자 결론짓고  딴지를거네요    여기는 자유게시판  그냥 자기 생각을 설파하면됩니다

전체 18,598건 843 페이지
게시물 검색
Copyright © https://gtksa.net. All rights reserved.
PC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