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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에 내던져진 풋내기 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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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nickname
댓글 3건 조회 362회 작성일 20-01-28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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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알려진 어떤 사람을 소개하면 십중팔구 선입관 없이

바른 판단이 힘들겠다는 생각에 약간 돌아가는 중입니다.

우선 심심파적으로 읽을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nnn>

 

 

황야에 내던져진 풋내기 소위

 

 

1966년 2월 28일은 소위로 임관하는 날이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나란히 졸업식에 참석하여 육군소위로 임관하는 180명의 동기생과 일일이

악수를 하셨다. 졸업을 학수고대하던 동기생들도 막상 졸업을 하게 되니 꽤

허전한 모양이었다. 말이 졸업이었지 이는 또 다른 고된 훈련으로 이어지는

통과의례에 불과했다.

불과 일주일간의 졸업휴가가 끝나기 무섭게 나는 전남 광주에 있는 병과학교에

내려가 5개월간의 전술교육과 1개월간의 유격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갖나온

소위들은 ‘졸업을 했으니 이제부터는 지긋지긋한 내무반 생활이 아니라 하숙생활을

하면서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라 기대했다. 왠지 하숙생활에는 낭만이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꿈들은 상무대 입교 첫날에 산산조각이 났다.

 

첫날부터 야전 내무반 생활이 시작됐다. 사관학교 내무반이 호텔방이라면 포병학교

내무반은 3류 여관방이었다. 내무생활을 지도 감독하는 간부들은 통상 육사선배였다.

이들은 사관학교를 18기로 졸업한 중위들로 소위들을 인격체로 보지를 않고 새카만

후배로만 취급했다. 소위들은 “우리를 언제까지 영내생활로 붙들어 맬 작정이냐?

우리도 이제는 어엿한 대한민국의 장교들인데 왜 자유를 구속 하려고만 하느냐..”,

선배들을 향해 항의했다. 하지만 선배들도 장군들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에 불과했다.

그래도 후배들은 그들의 요구를 반영해주지 못하는 선배들을 원망했다. 선후배간에

불신과 불화의 씨가 싹튼 것이다. <중략..>

 

지겹던 포병학교 전술 과정도 8월 말에 드디어 끝이 났다. 소위들은 4년 반이라는 단체

생활을 청산하고 제각기 전방부대로 흩어졌다. 마치 어미 품을 떠난 병아리들이 흩어지듯..!

매일 얼굴을 볼 수 있는 동기생들은 이제 더 이상 없게 됐다.

 

1966년, 양평에 있던 백마부대가 맹호부대의 뒤를 이어 월남으로 달려갔다. 백마사단이

남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조치원에 있던 제32향토사단이 정규사단으로 증편되면서

양평으로 이동했다. 수천 명의 병사들이 여러 부대에서 공출되어 왔다. 아마 각 부대에서는

요긴하게 쓸 만한 병사들은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제32사단 제298포병대대의 작전보좌관으로 보직됐다. 지역도 사람들도 낯설었다.

황야에 내던져진 외로운 송아지라는 생각이 들만큼 불안하고 허전했다. 이제까지는

누군가에 의해 피동적으로 움직여졌지만 이때부터는 혼자 선택하고 혼자 모든 책임을

져야만 했다. 직속상관인 작전과장은 고참 대위로 대대장과 부대대장에 이어 세 번째로

높았다. 작달막한 키에 통통한 체구, 성질이 급하고 변덕이 많아 동작이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를 불안한 사람이었다. 작전과에는 ROTC 소위가 또 한 사람 있었다. 그 소위는

작전 과장의 성질을 잘 맞추면서 작전과장이 기르는 토끼, 닭, 강아지 같은 가축들을

보살펴 주기도 하고 새 가축을 사다가 재산(?)을 늘려주기도 했다.

 

포병대대에서 작전과장의 위치와 역할은 대단했다. 그런데 그 작전과장이 행패를 부렸다.

원성과 불만이 높았지만 마음씨 좋은 대대장은 차마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그럴수록

행패는 날로 심했다. 밤이 되면 야외훈련으로 고생하는 포대들을 찾아다니며 하사관들의

술대접을 받기도 했고, 일에 열중하고 있는 하사관들에게 트집을 잡아 조인트를 까고 뺨을

때리기도 했다. 선물을 바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한다.

 

어느 날 나는 책상에 앉아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작전과장이 들어와서 말을 걸었다.

나는 책상에 정자세로 앉아 묻는 말에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이 웬일인가? 그가 갑자기

닥아 오더니 다짜고짜 나의 뺨을 후려치지 않는가. “이 ㅅㄲ야, 네가 그렇게 거만하냐?

야, 임 마, 과장이 물으면 벌떡 일어서서 대답을 해야지, 그래 뻣뻣하게 앉아서 대답을 해.

이 개 ㅅ ㄲ 같으니..” 얻어맞는 순간에는 온통 주위의 사병들의 얼굴만 떠올랐다. 부하들

앞에서 따귀를 맞다니!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나는 그 길로 자취방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버렸다. 소식을 들은 대대장님이

숙소까지 찾아와 나를 달랬다. “J소위, 내가 작전과장을 혼내 주었으니 내일부터 출근하게.

우선 포대장 자리가 비어 있는 B포대로 내려가 포대장 대리 직무를 수행하게, 대위가 통솔

지휘하던 부대를 소위가 지휘하는 것은 대위로 진급한 것이나 같은 것 아닌가..?”

나는 제2포대 즉 B포대에 가서 누구의 간섭 없이 포대장 대리로 근무했다.

 

포대에는 ROTC 출신 소위가 두 사람 있었다. 나와 같은 연도에 임관한 ROTC 4기였다.

백소위는 토요일에 외박을 나가면 수요일에야 돌아왔다. 주의를 주면 알았다고 해놓고는

또 그랬다. 그래서 장교들은 그를 함흥차사로 불렀다. 전주 출신 유소위는 툭하면 병사들에게

욕을 하고 난롯가에 있는 장작을 무자비하게 집어던졌다. 그의 잔인성은 습관이었다.

병사들은 그런 그를 무서워하면서도 속으로는 불만을 쌓고 있었다. 한번은 덩치가 크고

성깔있는 하사가 술을 먹고 내무반에서 그를 향해 총기를 난사 했다.

 

그때만 해도 미8군의 지휘검열이 있다고 하면 지휘관들이 아주 긴장을 했다. 추운 겨울

날 저녁, 대대장으로부터 숨 가쁜 지시가 떨어졌다. "내일 새벽 6시에 8군 출동태세 점검이

있으니 만전을 기하라" 생전 처음 당하는 일이라 공포감마저 들었다. 경험이 많은 고참

대위들은 담당 포대로 돌아가 간부들에게 엄하게 지시를 내렸다. "내일 새벽 미8군 출동

태세 지휘검열이 있을 예정이다. 각자 적재카드를 찾아놓고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 잘못하면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다. 알겠나?" 이렇게 다짐하고 이내 퇴근들을 했다.

경험에 비춰볼 때 그렇게 하면 다 잘될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출동준비가 무엇을

뜻하는지 조차 모르는 풋내기 소위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나는 간부들을 모아놓고 명령의

취지를 전달했다.

이에 대해 하사관들은 "소대장님, 이런 일, 한두 번 해 봅니까? 걱정 마시고 퇴근하십시오..."

건의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1개 분대만이라도 간단히 예행 연습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 나이 든 하사관들이 반갑지 않은 눈치를 보였다. 얼큰한 찌개와 소주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무반 마루에 분필로 트럭적재함 크기의 네모를

그리게 했다. "지금 비상이 걸렸다고 가정하고 이 박스 안에 전투 장비를 실어봅시다."

 

포병에는 장비와 물자가 많다. 출동하려면 차량마다 많은 것들을 실어야 한다. 빠짐없이 싣고,

찾고 싶은 것을 쉽게 찾아내기 위해서는 어느 물자가 어느 차량 어느 위치에 실려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수단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손바닥 크기의 "적재 카드"였다.

중사에게 적재카드 하나를 꺼내보라고 했다. 그 카드에 따라서 장비를 하나씩 실어보았다.

문제없다던 적재카드에 문제가 많았다. 적재 위치와 적재 순서가 너무 비현실적인 경우가 많았다.

실어야 할 장비가 어느 창고에 보관돼 있는지도 몰랐다. 찾는 장비가 무거운 물건들 속에 감춰져

있어 꺼내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자주 꺼내야 하는 물자가 맨 밑에 실리도록 작성돼 있었다.

이동 중에 물자들이 이리 저리 요동을 치도록 작성돼 있었다.

내가 문제들을 지적하자 모두 동감을 했는지 간부들과 병사들이 시키지도 않는 토의를 했다.

스스로 문제를 찾아내고 스스로 풀기 시작했다. 문제를 발굴해내는 데에도 병사가 최고였고,

대책을 내놓는 데에도 병사가 최고였다. 새벽 2시가 돼서야 모든 문제가 정리됐고 새로운 적재

카드들이 만들어졌다.

 

비록 몸은 고단했지만 병사들은 다음날 아침에 무엇을 해야 할지를 딱 부러지게 외웠기에 마음이

편했다. 공기마저 팽팽하게 얼어붙은 새벽 6시, 서슬 퍼런 비상이 걸렸다. 내가 지휘하던 포대는

40분도 안돼서 "출동 준비 완료 !"를 우렁차게 보고했다. 대대장 이하 모두가 놀랐다. 그러나 고참

대위들이 이끄는 포대들은 2시간이 지나도 끝나지 못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대위들이 병사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막대기를 던지고 소총을 휘둘렀다. 병사들은 성난 장교들을 피해 바쁘게 뛰었지만

뛰는 양에 비추어 성과는 저조했다. 경험이라는 것은 조직적인 사고력 앞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비판 없이 쌓은 경험은 두뇌만 퇴화시켰다. "엄명"은 부질없는 존재였다. <중략..>

 

어느 추운 날 저녁, 대대의 최고참 상사가 PX로 초청했다. PX라고 해봐야 막걸리와 과자 몇 가지

파는 곳이다. 흙벽돌을 올려 쌓고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얹은 오두막, 대대 내의 중사, 상사들이

총집합해 있었다. 엉성한 나무탁자에는 막걸리에 꽁치찌개 안주가 차려져 있었다. 당시엔 그런

상차림에도 마음이 충분히 설렜다. 막걸리는 상급부대에서 사오다가 중간에서 약간의 개울물로

희석한 것이긴 해도 몇 사발 마시면 혀가 꼬부라질 만큼 위력이 있었다.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모두

거나하게 취했다.

 

바로 그 때 하사관들이 하나씩 둘씩 돌아가며 충격적인 경험들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상사 한 사람이 군화 끈을 풀고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려 보였다. 그의 온 정강이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작전과장이 사정없이 발로 찼다는 것이다.

“세상에!” 나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뺨 맞은 상사, 조인트 까인 중사, 눈퉁이를 맞은 중사,

막대기로 팔꿈치를 맞아 팔을 쓰지 못하는 중사, 타격 부위들을 차례로 보여 주었다.

‘저들의 부모와 아내와 자녀들은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불끈 두 주먹이 쥐어 졌다. “내가 군대를 그만두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개 ㅅ ㄲ는 죽여

버릴 겁니다. 갑시다!” 혀가 꼬부라질 대로 꼬부라졌고,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예, 우린 내일 죽어도 좋습니다. 따르겠습니다.”

 

왁자지껄하며 좁은 숲길을 걷는 동안 모두가 비틀거렸다. 부대 뒷문으로부터 숲길을 따라 300m 거리에

지어진 흙담집, 창호지를 통해 하얀 불빛이 봉당에 놓인 군화와 여성용 빨간 구두를 비추고 있었다.

작전과장의 거침없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애인의 애교 섞인 웃음소리도 들렸다.

 

“과장님 계십니까?” 성질 급한 작전과장이 가벼운 창살문을 성질대로 열어젖혔다. 

“야, 이 개 ㅅ ㄲ야, 여기가 어디라고 술 처먹고 와서 행패야!”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내 따귀를 후려

갈겼다. 눈에서 불이 번쩍 났다. 이내 나의 멱살을 잔득 움켜쥐었다. 합기도 유단자 멱살을 잡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반사적으로 그의 손목이 꺾였다. 그는 비명을 지르면서 무릎을 꿇었다. 내 오른쪽 무릎이

그의 얼굴을 반사적으로 타격했다. “억” 소리를 내며 경사진 언덕으로 굴러 내렸다. 엎치락뒤치락

구르면서 싸웠다. 10m 언덕을 다 굴러 내리자 지켜보던 하사관들이 우리를 떼어놓았다. 손목시계도

달아나고 없었다.

 

이튿날 부대 출근을 못했다. 온 몸이 뻐근했고, 온 세상이 어두워 보였다. 하극상 처벌도 예상됐다.

‘에이 모르겠다. 제대하라면 하지 뭐.’ 컴컴한 자취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소문을 들은

부대대장 사모님이 대위 부인들을 인솔하고 찾아오셨다. 갈비찜, 두부찌개, 김치찌개, 윤기 흐르는

쌀밥 등을 싸가지고..! 부대대장 사모님이 대위들 집집에 전화를 해서 한 가지씩 만들어 오게 했을 것이다.

 

“J소위! 이럴수록 정신을 차려야 해.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참지 그랬어! 색시처럼 수줍어하고, 순해만

보이던 사람한테 그런 불같은 구석이 다 있었네..”, “대대에서 J소위 나쁘다는 사람 없어, 평소에 점수를

많이 땄고, 작전과장을 좋아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 “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 사람 고삐 풀린 망아지

아녜요? 대대장님도 마음씨가 너무 좋으셔서 어찌하지도 못하시고, 하긴 그 사람 혼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잘 혼났지 뭐, 안 그래요 사모님?”, “그렇지만 술을 그렇게 술 마시고 상관하고 싸우면 손해

보는 쪽은 J소위라구..”, “반찬들 놓고 갈 테니 많이 먹고 정신 차려 응?”

 

어두컴컴한 방에는 또다시 외로운 적막이 흘렀다. 대대의 모든 대위들이 몽둥이 하나씩 들고 달려올

것만 같았다. ‘야, 이 새까만 소위 ㅅ ㄲ가 감히 고참 대위를 때려? 이 ㅅ ㄲ 정신 한번 차려 봐라!’

환청까지 들렸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토끼잠이 들 때마다 여지없이 악몽이 찾아들었다.

 

오후가 되자 수송과장님이 찾아오셨다. 마음씨 좋고 시원시원한 고참 대위였다. 

“음, 자네 얼굴은 깨끗하구먼. 작전과장 얼굴은 아주 엉망이야. 그 사람 창피해서 출근을 못하고 있네.

이보게! 이럴 때 잘잘못을 따지는 건 부질없는 일일세. 따지지 말고 무조건 고개를 숙이게, 작전과장에게

숙이라는 게 아니라 대위 계급장에게 숙이게,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잘못했다고 하는 것은 쑥스럽지

않은 일일세, 잘못해서 잘못했다고 빌라는 게 아닐세, 남 보기 좋게 하자는 것일세, 그렇게 하는 게 앞으로도

좋을 걸세. 자, 내 차 타고 부대로 들어가세”

 

참으로 고마웠다. 그분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와 닿았다. 그의 손에 이끌려서 작전과장 집으로

갔다. 그는 차마 내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멍들고 상처 난 얼굴을 반대쪽으로 돌리면서 나의 사과에

억지로 대답했다. “괜찮아..”

대대장님에게 갔더니 애써 모른 체 하셨다. 중위와 소위 그리고 하사관들은 작전 과장이 얻어터진 것에

대해 고소해하는 눈치들이었다.

 

며칠 후, 사단 헌병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당장 오라는 것이었다. 헌병대장은 육사 출신 소령이었다.

그는 나를 수사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불렀다. 나는 있었던 사실을 담담한 자세로 진술했다. “작전과장이

자네를 고발했네. 그 사람 말을 들을 때에는 덩치도 크고 우락부락한 장교인줄 알았더니 약하고 착하게

보이는구먼! 육사를 졸업하고 이제 겨우 장교생활을 시작했는데 이런 일로 처벌을 받으면 되겠나? 사소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일생을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네. 앞으로는 이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게. 자네

대대장과 통화를 했네. 자네를 극진하게 생각하시더구먼. 가서 열심히 근무하게.” “네, 감사합니다.”

<중략..>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 하자포리, 그곳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당직 날이었다. 행정반 병사들은 내가

당직을 서는 날을 학수고대했다. 내 차례가 오면 병사들은 반합에 쌀밥을 짓고, 꽁치 통조림으로 찌개를

끓이고, 두부를 손바닥 크기로 썰어 사이사이에 고춧가루를 넣어 끓이고, 막걸리를 받아왔다.

 

설렘에 들뜬 아이들처럼 싱글벙글하면서 행정반 책상 위에 상을 차리던 그 정겨운 모습은 지금도 손에

잡힐 만큼 가까이 있는 그리움이다. 별마저 얼어붙은 야심한 밤, 산자락에 지어진 블로크 내무반에 피어

났던 그 훈훈한 인정과 정취는 이후 그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귀한 추억이 되었다.

 

 

월남에 먼저 간 동기생들의 전사 소식이 속속 날아들었다. 그래도 초급 장교들은 참전의

기회를 꼭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참전 기회를 갖지 못하면 비겁한 것이라고 생각들 했다. ‘맹호는 간다.,

달려라 백마’, 경쾌한 군가가 매일같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 치고 이 군가에

눈시울을 적시지 않은 사람 드물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도 남을 도울 수 있다’, ‘우리도 민주주의 수호에 주역이 됐다.’ 그 시대에는 이런 자부심이 국민

사이에 팽배 했다. “아, 자랑스럽다, 대한의 건아!”, “국위를 선양하고 민주주의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보무도 당당하게 이국 만리 전쟁터를 향해서 떠나는 늠름하고 자랑스러운 대한의 건아들을 보라...! 방송국

아나운서의 북받치는 감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이광재 아나운서의 음성이 청취자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중략..>

 

강재구 소령! 파월훈련 중에 부하가 병사들 틈으로 잘 못 던진 수류탄으로부터 부하들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몸을 던져서 수류탄 폭발을 끌어안고 산화한 강재구 대위가 1계급 특진되어 영웅으로 등장했다.

이는 타락했던 전후의 귀족세력과 침체됐던 사회분위기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주월 한국군의 눈부신

역할이 거의 매일같이 뉴스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극장에서는 따이한의 활약상과 용맹성이 「대한뉴스」를

장식했다. 최근의 월드컵 축구를 보면서 국민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열광하듯이, 그 때는 파월한국군의 활약

뉴스에 국민이 하나가 되어 열광했었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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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트님의 댓글

페인트 작성일

정말 재미있게 보고 있읍니다.  그런데 그렇게  베트콩들을 많이 죽였는데도 지금 비에남에는 베트콩후예들이 거의 1억명이나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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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ickname님의 댓글

nonickname 작성일

과분한 칭찬이십니다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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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only님의 댓글

timonly 작성일

감사합니다.  지금 세대들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로 느껴지겠지만,  형들의 세대가 파월장병으로 나갔던  세대를 살아 익히 그 시대로 돌아가보는 듯 했습니다.  글도 잘 쓰시는데, 중략없이 신문에 연재 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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